인사드립니다.
처음으로 인터넷 공간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인사를 드릴 수 있게 되어서 대단히기쁨니다. 저의 신앙은 아버지 고 김시원 목사의 장남으로 45년의 목회를 옆에서도우면서, 그리고 그 후 제가 미국에서 거주 할 때 자의에 의해서 신학을 공부를하면서 쌓아진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저의 믿음은 제가 노력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기간이 결코 짧은 것도 아니었지만, 그 성숙의 과정은 상당히 느린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게속적으로 돌보시어서 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이시점에서 믿음에 대한 이해를 저의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싹이 트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에 대한 선물을 이처럼 늦게나마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독자들에게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홈페이지에는 올린 대부분의 글은 명망이 높으신 분들의 글들을 발췌를 해서 번역이 된 것들과, 혹은 다른분들이 번역을 한 것을 발췌를 해서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때로는 제가 작성한 글들도 올리게 될 것입니다.또한 제가 작성한 것들 중에서 성령의 활동에 대한 글들과 환경문제와 관련이 된 글들도 오르게 됩니다. 목회의 현장에서 가장 부담이 되는 것을 도와 드린다는 생각으로 설교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려지고 있습니다. 설교에 대한 글들 중에서 제가 많은 비교적 정성을 드려서 번역을 해서 올리게 될 글은 저의 은사님이 되시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의 스위지 박사님의 설교사역에 대한 글입니다. 스위지 목사님의 설교사역에 대한 글은, 저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한국의 목회자들과 그리고 그 말씀들을 듣는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성장을 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는 데에서, 가장 확실한 도움을 주는 가르침이 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개인과 가정위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김종혁 드림
김종혁 교수 프로필
인사드립니다.저는 부모님의 고향이 되는 지금의 경북 안동시 예안면의 한 신학생의 집에 1935년에 나서 자랐습니다. 제가 5살 쯤 되었을 때 지금의 고양시행신동에 있는 작은 농촌교회에 부임이 되어서 저희는 북부 경기도로 이사를 갔습니다. ... ... ... 6.25 사변이 휴전이 되면서 아버지께서는 전에 계셨던 대방동 교회에로 다시 목회를 하시게 되었고 저는 사변 중에 제주 오현중학교를 졸업을 했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서울공업고등하교 응용화학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당시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의 생활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아마도 요즘 보다 생활이 좀 더 가난한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를 졸업을 할 무렵, 저는 건강이 좋지 않으신 아버지와 가정상황을 고려할 때 당시 대학의 교육비의 전액을 국비로 시행이 되고 있는 부산의 한국해양대학교에 진학을 하는 것이 저와 저희 가정을 위한다는 생각으로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계셨었는지 저는 해양대학 입학시험장에서 연령이 2개월 초과가 된다고 해서 시험 한 번 보지 못하고 퇴장이 되었습니다. 별도리가 없어서 당시에 후기 대학에 속하는 한양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이 되어서 화학공학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대학교에서 한국의 화학공학계의 선구자들이셨던 안동혁 (화학공학기술 공정), 성좌경(폴리머 화학), 김순경(물리화학) 유명한 교수님들의 명강의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후일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저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의 일이었습니다. 그 후 군복무를 필하고 대학을 졸업을 할 무렵이 되는 61년도에 정부에서 제1회 5급 국가 공무원 선발 시험에 합격을 하고 교통부 서울공작창 재료시험실 발령으로 근무를 하다가, 한미재단의 도움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63년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미주리 주립대학교 학부와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재료과학을 전공하고 졸업을 했습니다. 미국 유학의 초기에는 영어는 물론 재료과학분야의 이론들 자체가 생소한 학문이어서 처음에는 고통을 많이 겪었지만 대학원에서 유명한 교수님으로부터 수업을 하면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후 미국에서 재료과학에 대한 연구 경력은 유니언 카바이드,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연구원, 랭카스터 유리회사, 훼로(Ferro) 연구소 전자재료등에서 초 고온도에서 견디는 재료와 특수재료들을 개발하는 과제에 참여를 해서 그 과제들을 발전을 시키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갖고 있는 일터에서,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원인을 모르는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가을을 타는 젊은 처녀처럼" 가슴의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그 허전함을 채울 길이 없어서 가족과 의론을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결론은 세계적인 신학대학과 대학교가 있다는 뉴저지주에 있는 그 조그한 프린스턴 시로 이사를 가기로 한 것입니다.
그 일은 저에게는 마치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아지 못하고 고향과 친척을 떠나는" 일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유홀을 끄는 큰차를 끌고 집사람은 아이들과 함께 작은 차를 아이들과 함께 말로만 듯던 프린스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갔더니 그 유명한 신학대학에서 가족이 많다고 해서 작은 독립가옥의 집을 배당을 해 주셔서저희들은 처음으로 조용한 야구장이 근처에 있는 독립가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세 아이들은 비록 공립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었지만 그 아이들이 그들이 두각을 나타나게 되면서 열심히 공부들을 하면서 운동들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점차 알게 된 일이지만 프린스턴 공립학교들 중에는 대학교의 교수들과 연구원들의 자제들이 많이 있어서 심심치 않게 그 아이들과 저희 아이들이 공부에서 경쟁의 대상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미국에서 좋다는 학교에 모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저희 세 아들 아이들고 차례로 하버드대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하나는 대학원, 둘은 학부에 진학을 했습니다. 공부를 한 후 좋은 유명대학교의 의과 대학의 교수직들과 그리고 세 째는 다국적 기업체의 수석법률가로 일들을 하고 있는 것들은, 저회가 오하이오 주에 거주하고 있었을 때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프린스턴에서 처음 3년은 목회자가 되는 과정에서 공부를 했고 그 후 저를 가이드 하시던 교수님의 충고로 프린스턴에 계속 남아서 박사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는 본래 미국 장로교단에 의해서 같은 교정에 세워진 학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두 대학원들 중에서 어느 한곳에 입학이 되면 입학생의 학문적 배경에 따라서 두 학교의 협의 하에 지도 교수들이 정해지고, 그들의 의견에 따라 그 후에 있을 3년간에 택하게 될 과목들이 정해지게 됩니다. 저는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지원을 했는데 그 무순 유명세(?)를 타야 했었는지 당시 제가 지원한 선교- 문화- 사회 분야는 정원이 3명인데 그 해에는 무려 120명의 지원 생들이 세계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박사 원 연구생으로 있었을 때에 세계교회 협의회의 초빙으로 그해에 MIT(매사추세츠공대)에서 3주간의 신앙- 과학- 미래의 주제로 모이는 세계대회의 직원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그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산업기술과 사회라는 주제로 모이는 세미나에서 강사로 강의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 주의 한 번씩 모이는 당시의 세계적 명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을 할 기회도 주어져서 미래에 대한 일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미국 연방정책연구원, IBM 회사, 그리고 소수의 신학자들로 구성이 된 "컴퓨터의 인간적 사용"이라는 주제로 모인 60 명의 포럼위원으로 봉사도 했습니다. 또한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모이는 "언어와 사회" 라는 주제로 모이는 국제 학술대회에 진행위원으로 초빙이 되어서 참여를 했습니다.
끝으로 너무나 과분한 영예로운 일이 아시아에서 온 한 외국인 학생인 저에게 1980년도 박사학위 최종 후보생 선발종합시험이 끝나고 12명의 구술시험위원들의 구술시험에 합격을 한 후에 일어났습니다. 점심을 내신 당시의 선교- 문화- 사회 분야의 학과장이셨던 Richard Shaull 박사께서 자신이 갖고 계셨던 "Paul Louis Lehmann Scholar - 폴 레만 제자" 라는 칭호를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고 폴 루이스 레만 박사님은 프린스턴에서 1947년 이후 근 10여년의 기독교 윤리학교수로 봉직을 하셨고, 미국의 신학자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셨던 국제적으로 명망이 높으셨던 분이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 분의 학문의 칭호를 물려받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창조 된 (사도신경에서 지적이 되고 있는 대로) "성도의 교제"라는 친교에 대한 말씀은 본질적으로 오늘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도덕적 관념의 배경으로, 인간의 삶의 형태는 심오하게 과학적으로 되어있음을 계시 한다"라는 레에만 박사님의 해석을 제가 조금 더 가깝게 이해를 하고 있다는 판단으로, 저에게 그분의 학문적 칭호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을 해 봅니다.
지금까지의 경력으로 저는 공학도이며 장로교단의 신학도이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의 신학대학에 재학을 하고 있었을 때에는 교역자가 없는 인근에 있는 교회의 임시 목회자로 섬긴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뉴욕 미주 한인장신대(학감), 미국 뉴욕대학교, 벨리포즈 대학 등에서 관련된 분야와 신학과 성경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가족이 영구 귀국하기 직전과 귀국 후에는 장신대학교(학부 신학과장), 평택대학교( 구 피어선 신학대학의 신학대학원 원장), 전주 한일장신대학교(대학원장 및 총장서리 등),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과, 퇴임 전에는 서울, 광주, 대구, 부산 등에 있는 장로교총회(통합측)의 속한 목회자 계속 교육원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저서들로는 "새로운 눈으로 읽는 현대한국신학"(제2장 한국의 생태신학에 대한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출판)등의 저술과, 국내외에서 발표한 저서(장별로 나눠진 것들과 논문들과 글들이 있습니다. 또한 프린스턴신학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들의 지도로 완성이 된 생태학에 대한 박사학위(Ph.D.) 논문 있으며 그 논문은 심사위원들에 의해서 출판물로 추천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대한 교과서 주식회사의 아이세움 출판사에서 기획을 한 총 10권의 "지혜를 주는 성경이야기- 파워 바이블"의 성경요절들을 정하고 각권의 내용들을 성서 신학적으로 감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 청소년. 소녀들과 어린이를 위한 이들 만화는 현재 프랑스, 미국, 인도네시아에서 현지어로 출판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일반 신학, 성령 론, 치유에 대한 글, 설교에 대한 글들이 저의 홈페이지에 연제 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은 명사들이 쓰신 글들을 번역을 하거나 또는 다른 분들이 번역을 한 것을 발췌한 글들입니다. 독자들께서는 http://blog.naver.com/jogold35 , http://elivingwater.modoo.at 로 들어오시면 보실 수가 있습니다.
한 때 저희는 오하이오 주라는 미국 중서부에서, 공부를 마치고 아름다운 환경을 갖고 있는 좋은 직장에서, 맡겨진 일들을 하면서 한 생애를 편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프린스턴으로 이사를 가기 직전에 더 좋은 연구소에서 제안이 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격려를 하셔서, 가족을 이끌고 그 어떤 장래에 대한 전망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정든 고장을 떠나 프린스턴으로 이사를 간 뒤에 상상도 못했던 많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었고, 또한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앞으로도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그 때 일들을 회상을 해보면 은혜의 성령님의 활동에 대해서, 저와 가족이 했던 응답으로부터 비롯된 하나님의 선물들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